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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들/독서와 감상10

잊혀지는 것, 그리고 쓸쓸한 碑 사람이 죽는다. 명멸하다가 결국 빛이 사그라들고 없어진다. 그러나 그 존재의 개념 자체가 없어지는가. 그 사람이 기억되고 이야기되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히 죽었다고 할 수 있을까. 과거 역사 속 압제자와 군주들, 그리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죽여 없애고 싶어하던 이들은 그들의 이름을 지웠다. 칼로 후벼내고, 먹물로 덧칠했다. 사람들 속에서, 역사 속에서 잊혀진다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 죽음인가. 갑자기 떠오른 단상. 중국 역사의 유일무이한 여제 측천무후는 자신의 비를 무자비, 즉 글자가 없는 비석으로 만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동진의 사안이라는 이는 위대한 업적과 공을 글로 담을 수 없어 무자비를 만들었고, 송대의 진회는 오명을 너무나 크게 남겼기에 글로 남길 수 없어 무자비를 만.. 2022. 4. 10.
생의 의미를 갈구하는 위대한 순간,『이반 일리치의 죽음』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살아갈까. 수많은 이들이 고민한 질문이지만, 동시에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질문이기도 하다. 개개의 삶에 그 이유가 있어서 아무도 남에게 설명할 수 없던 것인지, 혹은 그저 멀고 먼 어딘가에 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우리의 세계는 이유를 알 틈도 없이 움직이기에 때때로 삶의 이유는 그 삶에 고요히 잠겨든다. "톨스토이는 정말 맹렬하게 삶에 집중했다고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개인적/사회적/역사적 조건 속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인생을 살아갔던 것이다. 러시아 혁명 사상가였던 게르친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그는 "얼음이 깨지고 있다면 유일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더 빠르게 걸어가는 것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창비) 128쪽의 작중 해설 인용. .. 2021. 8. 27.
시대의 고통을 마주하는 윤리,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를 읽는 법 이 글은 2019년, 황정은 작가의 신작 『디디의 우산』을 읽고 써본 에세이이다. 『디디의 우산』의 경우 2010년 발표된 「디디의 우산」과 2014년에 발표된 「웃는 남자」로 이어지는 연작의 형태를 띄고 있다. 그러나 이 연작에서 벗어나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를 함께 수록하기에 문제가 되기도 하고, 아무래도 분석해볼 여지가 많은 작품인지라. 당시에 분석에 꽤 공을 들였다. 지나고 보니 참 러프한 글이지만. 써둔 것두 아쉽구 황정은의 멋진 작품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길잡이가 될까 하여. 이번에 출간된 『연년세세』도 집중해 읽었던 터라, 추후 이어지는 글을 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길고 긴 이야기입니다. 10년동안 써내리는 어느 작가의 노력이란. 분석해야 할 문제들 올해 1월 출간된 황정은.. 2021. 7. 28.
무한의 가능을 떠도는 창작의 영혼: 「시 구름」 이 글에서 언급된 저서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미하엘 엔데, 『끝없는 이야기』, 허수경, 비룡소(200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송변선, 민음사(2011) 류츠신, 『우주 탐식자』, 김지은, 자음과모음(2019) 호메로스, 『일리아스』, 천병희, 도서출판 숲(2015) 오르한 파묵, 『소설과 소설가』, 이난아, 민음사(2012) 아서 C. 클라크 외, 『SF 명예의 전당 1: 전설의 밤』, 박상준 외, 오멜라스(웅진, 2010) 이 글은 창작의 원천에 대한 몇몇 고민들을 다룬다. 또한, 무한한 글자의 나열과 창작된 작품의 차이가 무엇일지에 대해 다룬다. 결론은 모호하나, 조금은 고민이 해소되는 이야기길 바랄 뿐이다. 서론: 모호한 질문과 흘러간 오답들 창작이란 무엇일까? 우리에게 위대한 .. 2021. 5. 19.
기계 뇌와 트리말키오 : 『사물들』을 읽은 뒤의 생각들 이 글은 2016년에 작성했던 에세이를 살짝 다듬은 것이다. 글을 썼던 당시에는 알파고 이슈가 한창 화제였던 터라, 하도 주변에서 알파고 알파고 해서 심통이 많이 났던 모양이다. 당시에는 꽤나 만족하며 썼던 글인데, 5년이 지나서 보니 주장마다 영 근거가 없어 기분이 마땅찮다. 그래도 그땐 그런 생각을 했구나 싶어 주석만 추가해서 옮겨본다. 인용된 책은 조르주 페렉, 『사물들』, 김명숙, 펭귄클래식코리아(2011) 이다. 기계 뇌와 트리말키오 - 소설 『사물들』에서 예측된 현대 소비사회에 대하여, 빅 데이터를 중심으로 본문에 앞서 - 인공지능은 ( )를 꿈꾸는가? 인간들은 바로 오늘 알파고에게 인간을 도둑맞았다 컴퓨터는 영웅이 되고 인간은 인공지능의 노예가 되었다 모두가 ‘알파고’를 이야기한다. 5번의 .. 2021. 4. 15.
오뒷세이아와 일리아스의 간극 이 글에서 쓰인 책은 다음과 같다. 호메로스, 『일리아스』, 천병희, 도서출판 숲(2015)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천병희, 도서출판 숲(2015) 피에르 비달나케, 『호메로스의 세계』, 이세욱, 솔(2004) 최근 대학에서 고전을 읽고 함께 논의하는 수업을 듣고 있다. 그 과정에서 고민해볼만한 여러 주제가 등장하여, 함께 토론해보고 의견을 나눴다. 오늘은 특별히 재미있던 질문 하나를 옮겨본다. "왜 『오뒷세이아』에는 오뒷세우스의 활이 갑자기 등장하는가?" 『오뒷세이아』를 읽다 보면 구혼자들을 시험하기 위해, 페넬로페가 오뒷세우스의 활을 당겨서 능력을 보일 것을 제안한다. 그런데 특이한 부분, 『일리아스』에서는 오뒷세우스가 활을 쏘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예외적으로 10권(이 부분은 후대의 가필이.. 2021.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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