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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들/독서와 감상

생의 의미를 갈구하는 위대한 순간,『이반 일리치의 죽음』

by 카프카뮈 2021. 8. 27.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살아갈까.

수많은 이들이 고민한 질문이지만, 동시에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질문이기도 하다.

개개의 삶에 그 이유가 있어서 아무도 남에게 설명할 수 없던 것인지,

혹은 그저 멀고 먼 어딘가에 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우리의 세계는 이유를 알 틈도 없이 움직이기에 때때로 삶의 이유는 그 삶에 고요히 잠겨든다.


"톨스토이는 정말 맹렬하게 삶에 집중했다고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개인적/사회적/역사적 조건 속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인생을 살아갔던 것이다. 러시아 혁명 사상가였던 게르친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그는 "얼음이 깨지고 있다면 유일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더 빠르게 걸어가는 것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창비) 128쪽의 작중 해설 인용.

명예로 불멸하기를 꿈꾸며 살았던 『일리아스』의 사르페돈과 아킬레우스에서 시작한 고민은

우리는 그저 던져졌기에 산다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로,

혹은 그저 살아갈 뿐이나 그 자체를 즐기는 시지프가 되어야 한다는 카뮈의 부조리주의에 다다른다.

수없이 많은 삶이 스쳐갔으나, 점점 허무와 고뇌로 빠져드는 삶의 탐구 속에서

삶의 이유없음에 눈물 흘리고 동시에 삶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간 톨스토이는 독보적이다.


그리고 이제 갑자기 문제가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맹장? 신장이라고?' 그는 혼잣말을 했다. '맹장도 신장도 다 문제가 아니다. 삶이냐 죽음이냐의 문제다... 그래, 아직 살아 있지만 생명이 자꾸만 빠져나가고 있는데 난 잡을 수가 없다. 맞다. 더이상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나 말고는 모두들 다 분명히 알고 있다. 문제는 몇주, 아니 며칠을 더 살 수 있느냐뿐이다. 아니, 지금 당장일 수도 있다. 환하던 세상이 이제 암흑이구나. 그래, 지금 난 여기에 있는데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이냐? 도대체 어디로?' 한기가 덮치며 숨이 멎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만 들렸다.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창비) 67-68pp

 

이반 일리치는 누구보다 모범적으로 살아온 공직자로, 남들의 시선에 맞춰 출세하고 결혼하며 카드놀이를 즐기는 예심판사이다. 그는 그에 삶에 지극히 만족하며, 그를 괴롭히는 일이라고는 부서의 인사 이동과 그에 따른 그의 출세의 가능성 뿐이다.

 

출셋길이 막혀 고뇌하던 그가 행동에 나서 더 좋은 법관 자리를 얻어내고, 이사를 준비하며 집을 고친다. 그런데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옆구리를 부딫히고, 그는 그저 웃어 넘긴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비극은 찾아온다. 그의 몸에 고통이 스며들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얼굴은 까맣게 말라간다. 의사들은 그저 괜찮아질 것이라 말할 뿐. 그는 자신의 맹장인지 신장인지에 생긴 정체모를 염증이 증오스럽다.

 

그리고 어느 순간, 파티가 열리는 집안의 한 구석에서 고통에 신음하던 그는 죽음의 가능성을 직시한다. 그래, 나는 곧 죽을 수 있다. 그런데 왜 나지? 그는 고뇌한다. 그는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보고, 끔직했던 위선과 거짓의 나날을 후회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의 의미가 그에게 찾아오지는 않는다. 대신 그의 삶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확신이 찾아올 뿐이며, 그것을 자각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사흘 밤낮을 비명을 지르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 뿐이다.


그는 '쁘로스찌'(용서해줘)라고 한마디 더 덧붙이고 싶었지만 '쁘로뿌스찌'(보내줘)라고 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말을 바꿀 힘도 없어서 손을 내저었다.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들을 것이다.
그러자 돌연 모든 것이 환해지며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며 마음속에 갇혀 있던 것이 일순간 밖으로, 두 방향으로, 열 방향으로, 온갖 방향으로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가족들이 모두 안쓰럽게 여겨지고 모두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다. 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신도 벗어나고 가족들도 다 벗어나게 해주어야 했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훌륭한 일인가?'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
죽음 대신 빛이 있었다.
갑자기 그는 소리쳤다.
"아, 이렇게 기쁠 수가!"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창비) 118-119pp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지나온 생 앞에 선 이반 일리치는 고통스럽다. 종교의 가르침도, 순박한 청년 게라심의 모습도 그의 고통을 감싸안지 못한 채 스쳐가고 말기에. 그는 끝내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

 

자신을 유일하게 동정하고 안쓰러워하는 아들의 그의 손을 붙잡고 눈물흘리는 모습을 보며, 그는 아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곁에, 임종을 맞기 위해 온 가족들을 보며 이 동정심을 전하려 한다. 끝내 미숙한 그는 용서해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나, 그래도 죽음만큼이나 깊어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그들에게 전달한다.

 

가식으로 찬 삶을 지나 찰나의 순간 사랑의 미로를 걸었기에, 모두를 용서할 수 있었기에, 그는 편안히 임종을 맞는다. 그의 죽음은 물론 가식 속에서 지나고 말지만. 우리는 그의 생이 주는 하나의 경건한 순간을 맞이한다.


톨스토이 식의 교훈담으로 기억하던 책이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그보다 훨씬 복잡한 이야기였다.

생에 누구보다 치열한, 그러나 그 이유를 알지 못해 고민한 톨스토이는

결국 미로에 갇힌 한 사내의 고뇌를 그릴 수밖에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보다는

그 미로를 헤메야 할 혹은 만들어야 할 나의 온전한 생을 되돌아보는 수밖에는.


덧. 이전에 펭귄클래식으로 읽었을 때에는 주제의식이 비슷한 다른 단편까지 묶음으로 되어 있어 만족했다.

다만 창비 번역본도, 표준 발음에 대한 강박적인 편집 외에는 아주 좋았다. 한 작품에 집중하기엔 더 좋은듯.

읽을 책이 없다면 가볍게 한 번 잡아보시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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