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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들/독서와 감상

무한의 가능을 떠도는 창작의 영혼: 「시 구름」

by 카프카뮈 2021. 5. 19.

이 글에서 언급된 저서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미하엘 엔데, 『끝없는 이야기』, 허수경, 비룡소(200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송변선, 민음사(2011)

류츠신, 『우주 탐식자』, 김지은, 자음과모음(2019)

호메로스, 『일리아스』, 천병희, 도서출판 숲(2015)

오르한 파묵, 『소설과 소설가』, 이난아, 민음사(2012)

아서 C. 클라크 외, 『SF 명예의 전당 1: 전설의 밤』, 박상준 외, 오멜라스(웅진, 2010)

 

이 글은 창작의 원천에 대한 몇몇 고민들을 다룬다.

또한, 무한한 글자의 나열과 창작된 작품의 차이가 무엇일지에 대해 다룬다.

결론은 모호하나, 조금은 고민이 해소되는 이야기길 바랄 뿐이다.

 


서론: 모호한 질문과 흘러간 오답들

창작이란 무엇일까?

우리에게 위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원천은 어디에 있을까?

수천년간 해결하지 못한 난제이고, 현재에도 유효한 질문이다.


호메로스는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라는 말과 함께 『일리아스』라는 위대한 서사시를 시작한다.

그가 그려내는 세계와 영웅, 불멸의 갈증과 죽음의 암담함을 노래하는 이는 무사(musa) 여신이기 때문에.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읆는 시인은 그저 여신의 가호를 받은 대리인에 불과하며, 창작의 원천은 신성에 있다는 생각은 얼핏 온당하게도 보인다.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 무한한 가능성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일리아스』와 『아이네이스』의 시대가 저물고 유럽의 중세가 시작된 뒤에도, 창작의 열정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유럽의 여러 민족은 『베오울프』, 『엘 시드의 노래』, 『롤랑의 노래』, 『니벨룽겐의 노래』와 같은 다양한 기원 서사를 써냈고, 거기에는 민족의 가치와 영웅의 활약이 가득 담겼다. 여신의 자리를 꿰찬 음유시인은 이 이야기들이 조상들의 전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인들은 수많은 이본(異本)들과 그 사이의 발전 과정을 설명하지 못한다. 시대가 지나며 서사시에서 제거되는 지루한 부분, 그리고 새롭게 추가되는 흥미진진한 대목들. 대체 누가 이것을 선별하고 다듬는가?


구전에 의존하는 수많은 전설과 신화의 시대를 넘어, 최초의 소설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작가와 독자는 암묵적인 약속으로 위대한 소설의 원천을 찾고자 했다. "소설은 일어난 사실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닐까?" 라고. 그런 인식으로 무한한 창작의 원천을 억죄었기에, 때때로는 자잘한 해프닝도 생기고는 했다. 오르한 파묵의 언급을 옮겨보자.

『로빈슨 크루소』가 세상에 나왔을 때 대니얼 디포는 소설이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감추고, 실제 겪은 이야기라고 주장했습니다. 나중에 소설이 '꾸며 낸 이야기'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부끄러워하면서 '어느 정도는 허구'라고 인정했다고 합니다. 

『돈키호테』, 아니 『겐지 이야기』에서부터 『로빈슨 크루소』, 『모비딕』에 이르기까지, 작가와 독자는 오늘날까지 수백 년 넘게 소설이 허구라는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애써 왔으나 여전히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소설과 소설가』 40-41쪽 인용.

소설이 사실의 기록이라는 것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리얼리즘에 기대는 소설이라도, 결국은 작가의 삶과 사회와 시대와 그리고 많은 것들이 응축된 허구의 작품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조합해내는 불가사의한 능력은, 결국 다시 미궁으로 들어가고 만다. 무엇이 사실의 세계에 발을 디딘 작가들로 하여금 허구의 세계를 그리게 하는가?


무한한 도서관과 창작이라는 허상

위대한 작가 보르헤스는, 창작의 근원에 대한 탐구에 파문을 일으킨다.

단편 「바벨의 도서관」에서, 그는 육각형 진열실들로 이루어진 무한한 도서관을 제시한다.

태곳적부터 존재한 도서관에는 기본적인 글자와 기호로 이루어진 가능한 모든 조합으로 이루어진 책들이 꽂혀있다. 이 책들은 모든 언어로 표현 가능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또한 도서관에는 동일한 책이 두 권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도서관에는 다음과 같은 책들이 꽂혀 있을 것이다.

미래의 상세한 역사, 대천사들의 자서전, '도서관'의 정확한 색인 목록, 셀 수 없이 많은 거짓 목록, 그런 목록들의 오류에 대한 증거, 진짜 목록의 오류에 대한 증거, 바실리데스의 그노시스 교 복음서, 그 복음서에 대한 주석, 그 복음서에 대한 주석의 주석, 당신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이야기, 각각의 책에 대한 모든 언어들의 번역본, 각각의 책을 모든 책에 삽입하는 것, 베다가 색슨족의 신화에 대해 쓸 수 있었으면서도 쓰지 않았던 논문, 타키투스의 소실된 책들(...)

『픽션들』 102-103쪽 인용.

바벨의 도서관에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고, 그 중에는 우리가 지금 명작으로 치켜세우는 책들을 우습게 만들 빼어난 작품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을지는 둘째치고, 그 책이 "창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보르헤스는 도서관을 떠도는 망령에 가까운 인간들의 고뇌를 통해, 그 난해함을 넌지시 암시할 뿐이다.


이 난해한 이야기는 미하엘 엔데의 손을 거치며 더욱 상세하게 묘사된다.

『끝없는 이야기』의 환상적인 묘사를 보자.

"저들은 더 이상 이야기를 할 수 없단다. 언어를 잃어버렸지. 그래서 내가 저들을 위해 이 놀이를 생각해 냈지. 보다시피 이 놀이에 저들은 몰두하고 있지. 게다가 아주 간단하단다. 네가 한 번만 생각해 본다면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근본적으로 겨우 스물 네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할 거다. 글자들은 언제나 똑같고 다만 그 조합이 달라질 뿐이지. 글자로부터 단어가 형성되고 단어로부터 문장이, 문장으로부터 장(章)이, 그리고 장이 합쳐져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거지. 저기 봐라, 저기에 뭐가 쓰여 있지?"

바스티안이 읽었다.
ㅠㅜㅡㅓㅔㄷㄹㅛㄱㅋㅍㅋㅌㅁ
(...)

"영원히 이 놀이를 하다 보면 가능한 모든 시들, 모든 이야기들이 생겨날 것이고, 게다가 모든 이야기 중의 이야기들과 심지어 지금 막 우리 둘이 나누고 있는 이 이야기도 생겨날 거야. 논리적이지. 안 그래?"

『끝없는 이야기』 587-589쪽 인용

무한한 가능성과 조합 앞에서, 창작의 위치는 흔들린다. 우리가 만든 작품들은 그저 우연하게 맞아떨어진 글자와 단어의 조합일까? 그렇다면 창작의 원천은 그저 무작위한 확률의 발현일 뿐일까? 무한히 작아져가는 확률을 뚫고, 책들이 하나하나 닿을 때마다 시릿한 고민이 커진다.


기술이 만든 환상, 그리고 원점회귀

창작을 겨우 확률의 수준으로 떨어뜨린 도서관의 역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컴퓨터의 등장에 따라 그것을 실제로 "구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제일 먼저 SF 작가들이 나선다.

 

아서 C.클라크는 「90억 가지 신의 이름」에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신의 이름을 수집하는 수도승을 등장시킨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특수한 문자로 90억 개나 되는 신의 이름을 300년째 기록하고 있고, 기록이 끝나는 순간 종말의 순간이 펼쳐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들을 돕는 것은, IBM의 워크스테이션 컴퓨터이다. 

티베트의 어느 절에서 초대형 컴퓨터가 작동하고, 프린터에는 각각의 문자를 조합한 신의 이름이 출력된다. 1년간 이뤄진 이 연산이 끝나고 엔지니어들이 라마 사원을 떠나던 도중, 갑자기 머리 위에 펼쳐진 밤하늘의 별들이 하나둘씩 사라진다. 라마승들은 위대한 창조의 근원을 마주한 것일까?


라마승들이 찾고자 한 것은 길어도 9글자 이내인 신의 이름이지만, 시대가 더 흐르자 그것을 시로 확장하려는 시도 역시 등장한다. 류츠신은 「시 구름」에서, 우주의 원리를 조종하는 신에게 이백의 시를 들이민다.

"우주에도 예술이 있습니까?"

공중에 있던 구형이 살짝 흔들렸다. 마치 고개를 끄떡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 나는 우주 예술을 수집해서 연구하고 있다. 성운을 지나면서 수많은 문명의 예술들을 접해 봤는데 대개는 복잡하고 난해한 체계였다. 그런데 이 시들은 전혀 다르군. 길게 늘어뜨리지 않은 절제된 글인데도 풍부한 감성과 깊은 의미를 담고 있고, 엄격하게 정해진 시율과 음운이 있는데도 자유롭다. 이런 건 처음 보는구나."

『우주 탐식자』 중 「시 구름」, 106쪽 인용

이백의 시에 충격을 받은 신은, 이백을 뛰어넘고자 자신의 모든 능력을 쏟아붓는다. 그는 자신이 이백을 뛰어넘는 길이 "모든 시를 쓰는 것"임을 알아챈다. 그러나 모든 시를 조합해내기 위해서는 10의 57승개가 넘는 양자가 필요하고, 이는 태양계 전체의 물질량을 합친 것보다도 크다. 이백을 뛰어넘겠다는 야망을 포기하지 못한 신은, 태양계를 소멸시키고 그 모든 에너지를 합친 성운 컴퓨터를 만든다. 이제 직경 100억 킬로미터의 성운 컴퓨터는 천문학적인 에너지를 들여 세상의 모든 시를 만들기 시작한다.

"(...) 너희가 아직 정복하지 못한 양자 계산 기술을 이용한다면 정해진 시간 내에 계산을 끝낼 수 있다. 그때가 되면 나는 모든 시와 사*를 쓸 수 있지. 과거에 나온 시뿐만 아니라 앞으로 미래에 누군가 쓸지도 모를 시까지도 전부 쓸 수 있어. 여기서 특히, 미래에 누군가 쓸지도 모를 시도 쓸 수 있다는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이백의 경지를 뛰어넘는 예술도 여기에 포함된다. (...) 그러니 이제 우주가 멸망할 때까지 세상에 나오는 시인은 그의 수준이 얼마나 높든 간에 모두 표절 시인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다. 그들이 창작했다고 쓴 작품들이 이미 내 대형 메모리에 담겨 있을 테니까."

*시와는 다른 형식의 운문으로 노래 가사에 가깝다
『우주 탐식자』 중 「시 구름」, 129-130쪽 인용

성운 컴퓨터의 3개월에 걸친 연산 끝에, 드디어 세상의 모든 시가 우주에 새겨진다. 그러나 신은 오열한다. 이백이 된 신은 발을 구르며 "하지만 그 시들은 내 것이 될 수 없잖아!" 라고 울부짖는다. 위대한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안을 감상해 보자.

"시 짓기 종결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 나는 시와 사를 식별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하지만 기술은 예술 안에서 다시 한번 뛰어넘을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났어. 그 후 지금까지 뛰어난 시를 골라서 감상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조차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

허공에 떠 있던 이백은 손가락으로 시운을 가리키며 이어서 말했다.

"이만하면 괜찮아. 위대한 기술의 힘을 빌려 시 중에서 최고의 걸작을 썼으니까. 비록 시운에서 그 시들을 찾지 못하겠지만......"

『우주 탐식자』 중 「시 구름」, 151쪽 인용

위대한 시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시를 써낸 신은, 그 안에서 걸작을 골라내지 못한다. 결국 조합 중에서 걸작을 골라내는 능력은, 그 자체로 창조의 능력이자 예술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신은 그저, 자신의 여정을 함께한 주인공에게 그들의 이름이 포함된 "수 억에 억개의 시"를 전해줄 뿐이다. 그 안에는 주인공이 겪을법한 모든 미래가 담겨 있지만, 아무도 이를 "찾아낼 수 없다".


무한의 가능을 떠도는, 창작의 영혼

기술의 발전과 몇몇 상징적 사건을 지나, 어떤 이들은 창작의 붕괴를 두려워한다.

압도적인 연산과 무한한 조합 앞에서, 우리의 작품들은 그저 운이 좋았던 몇몇 사례에 지나지 않을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한의 가능 앞에서 하나의 빛을 찾아낸 이들이 있었기에,

창작의 원천은 다시 모호한 세계로 흘러간다.

 

다만 무한한 조합의 구름이 우리를 감싸기에,

구름이 걷힐 때 여느 때처럼 좋은 작품 하나쯤은 우리에게 오지 않을까.

미덥잖은 결론을 내리고 잠을 청해본다.

 

"시운(詩雲)에 있는 수많은 좋은 시들이 아직 주인을 만나지 못했어.
인류가 그중에 일부라도 쓸 수 있기 바란다."

『우주 탐식자』  152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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