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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들/독서와 감상

일리아스와 불멸을 지향하는 방법

by 카프카뮈 2021. 3. 24.

* 이 글에서 사용된 책은 호메로스, 『일리아스』, 천병희, 도서출판 숲(2015) 이다.

 

일리아스에는 죽음과 체념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짧은 전투에서 전쟁을, 우리의 생을 끝없이 확대해서 보여주는 호메로스는,

그 이미지가 한 사람의 생을 온전히 그려낼 때에 비로소 그 삶을 "청동의 잠을 자게 된" 것으로 마무리한다.

죽음은 필멸의 신들만이 피할 수 있는 것이며, 최고의 영웅 헥토르와 아킬레우스조차 그런 이유로 두려움을 느낀다.

 

일리아스를 읽을때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아킬레우스도 헥토르도 스스로의 비참한 최후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후 시기의 비극 작품, 예를 들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같은 작품에서,

그리스 비극 특유의 운명에 대한 태도--운명을 피하려고 하나 운명은 결국 그를 덮친다--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리아스에서는, 운명을 피하려는 마음조차 없이 모두가 운명을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테세우스도, 헤라클레스도, 심지어는 신들조차 그 운명을 바꾸지 못하며 그저 관망할 뿐이다.

그렇기에 절대신 제우스 역시 자신의 총애하는 아들 사르페돈의 죽음을 막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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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일리아스를 재미있게 읽었다면, 다른 신과 달리 운명을 계획하는 자이자 절대신으로서의 제우스의 모습이 돋보일 것이다. 현대의 유일신 신앙 대신 자연 현상 혹은 감정과 형이상의 의인화를 신앙으로 가진 것이 당대의 사람들. 그렇기에 신들이 '인간적'인 것은 신의 위격이 낮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사람이란 틀을 씌워 이해하는 노력으로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제우스의 행동만은 특이한 면이 있는데, 이후의 철학/신학의 발전과 연결할 수 있을듯 하다.


아킬레우스는 계속 자신의 운명을 벗어남을 갈구하며 살아간 인물이다.

태어나서부터 필멸의 몸을 불멸로 바꾸고자 스틱스 강에 몸을 담궜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엔 여장을 하며 징집을 피하려고 했다.

전쟁터에 다다를 때에는 배에서 맨 처음 내린 이가 죽는다는 예언을 무시하려다가

어머니 테티스 여신의 간섭으로 다른 이가 대신 죽게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죽음을 어찌 피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그가 아가멤논과의 갈등으로 전장에 나가지 않기를 선언하고, 

그를 설득하러 장수들이 찾아오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9권 410-420행, 272p이다.

 

"나의 어머니 은족의 여신 테티스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두 가지 상반된 죽음의 운명이 나를 죽음의 종말로 인도할

것이라고 하셨소. 내가 이곳에 머물로 트로이아인들의 도시를

포위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막힐 것이나 내 명성은

불멸할 것이오. 하나 내가 사랑하는 고향땅으로 돌아간다면

나의 높은 명성은 사라질 것이나 내 수명은 길어지고

내게 죽음의 종말이 서둘러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오.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는 배를 타고 고향으로 떠나라고 

권하고 싶소. 그대들은 험준한 일리오스의 끝장을 결코

보지 못할 것이오. 목소리가 멀리 들리는 제우스께서 그 위에

보호의 손길을 뻗치시고, 그 백성들의 사기가 높으니 말이오."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면서, 아킬레우스는 두 가지 운명 중 하나를 선택하려 한다.

불멸하는 명성 대신, 긴 수명과 행복한 필멸자로서의 삶을 말이다.

친우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이후 아킬레우스는 비로소 불멸하는 명성과 그것이 수반하는 죽음의 종말을 받아들인다.

 

아킬레우스의 다음 대사를 보자. 21권 105-113행(599p)이다.

 

"자, 친구여! 너도 죽을지어다. 왜 이리 비탄하는가?

너보다 훨씬 나은 파트로클로스도 죽었다.

너는 보지 못하는가, 나 또한 얼마나 잘생기고 당당한가?

내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시고 나를 낳으신 어머니는 여신이다.

하지만 내 위에도 죽음과 강력한 운명이 걸려 있다.

그 누군가 창이나 또는 시위를 떠난 화살로 나를

맞혀 싸움터에서 내 목숨을 앗아갈

아침이나 저녁이나 한낮이 다가오고 있단 말이다."

 

이윽고 다음 권에서 헥토르를 아킬레우스가 살해할 때,

헥토르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22권 355-360행, 635p이다.

 

"내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고, 또 보고 있다. 그대는 결코

내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지. 그대의 가슴속 마음은 무쇠로

만들어졌으니. 하지만 이제 조심하라! 그대의 용기에도 불구하고

파리스와 포이보스 아폴론이 스카이아이 문에서 그대를 죽이는 날

나 때문에 그대에게 신들의 노여움이 내리지 않도록."

 

당대의 저술 방법과 작품 속 정보의 공유 범위가 지금과 다른 탓도 있겠으나,

어쨌든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의 죽음을 (분명 알 수 없을텐데도) 정확히 예언한다.

 

일리아스는 23권에서 파트로클로스의 추모 경기를 , 24권에서 헥토르의 시신의 양도를 보여주고 마무리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킬레우스의 죽음은 작품에서 다뤄지지 않으나, 그럼에도 '예언된다'

 

이런 독특한 구성은 하여금, 작품이 가지는 운명에 대한 체념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운명을 체념하고 운명과 신들에게 하여금 순종하기에,

아킬레우스는 24권에서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아들을 살해한 이에게 간청하는 프리아모스에게 말한다.

니오베(그녀는 자신의 자식들이 레아 여신의 자녀인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보다 뛰어나다고 주장했다.

이 불경죄의 결과로, 그녀는 모든 자식을 잃고 통곡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돌이 되고 만다)도 식사는 하였으니,

같이 식사를 하자고 말이다.

이 장면에서 왜 굳이 니오베의 이야기가 나올까? 나는 생각하건데, 아킬레우스가 제우스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신성한 운명과 자신의 죽음, 그리고 불멸하는 명성을 받아들이는 최종장이 아닐까 한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불멸과 필멸의 아이러니에 대해, 이만큼 잘 표현한 말이 없다.

사르페돈이 전투에 뛰어들며 하는 말이다. 12권, 322-328행, 362p이다.

 

"친구여! 만약 우리가 이 싸움을 피함으로써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을 운명이라면

나 자신도 선두 대열에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또 남자의 영광을 높여주는 싸움터로 그대를 등 떠밀지도 않을 것이오.

하나 인간으로서는 면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숱한 죽음의 운명이

여전히 우리를 위협하고 있으니 자, 나갑시다! 우리가 적에게

명성을 주든 아니면 적이 우리에게 명성을 주든."

갑작스레 떠올라서, 2000년 뒤의 우울한 이야기, 불멸하는 명성과 필멸하는 육신에 대한 대화를 옮겨본다.

 

햄릿         이보게, 호레이쇼, 한가지 답해주게.

호레이쇼   무엇을요, 저하.

햄릿         알렉산더 대왕도 땅속에서 이 꼴이었다고 생각하나?

호레이쇼   바로 그러겠지요.

햄릿         우린 죽어 얼마나 천한 데 쓰일까, 호레이쇼! 그래, 
               알렉산더의 고귀한 유골이 결국 술통 마개가 되는 과정을
               상상으로 추적해볼 수도 있지 않겠나?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설준규, 창비(2016), 5막 1장의 176-184행, 17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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