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 곁에서는 도저히 수가 없다며 떠나가는 자식에게 매달려보지도 못하는 인생이란
야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 그걸 아냐 그놈이 아비하고는 다르게 살아보겠다고
그토록 박차고 나갔건만 실은 보잘것없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아들의 인생이라도 별 수 없을 것이다
그놈도 나와 똑같이 보잘것없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웃었다.
음식을 담은 볼이 불룩하게 도드라졌다. 털을 곤두세우고 인간으로서의 노인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웃는다 운다 애석하다 통쾌하다 어느 것도 아니게 다만 기묘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 몸과 같은 묘씨생보다도 못한 일생으로서의 인생, 바로 그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라서 더욱 그랬는지도 몰랐다.- 황정은 『파씨의 입문』 수록작 「묘씨생」 120쪽
황정은 작가의 소설을 좋아한다.
『百의 그림자』 를 참 많이 읽었고,
『디디의 우산』 을 두 권이나 사두고는 이거 읽어보지 않을래, 하고 때때로 주변에 권하고는 했다.
어느 작가를 좋아해서, 그 작가의 작품들을 주욱 세워두고 서로 견줘보며 읽는 것은 독자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수밖엔 없다.
작가의 변모라고 하기보다는, 그보다는 작가가 고민하고 무언가를 겪고
그러니까 보고 들었으므로 사람이니까 바뀌는 것이 당연하니까
작품의 결이 바뀌는 것이다. 더 가벼워지기도 하고, 두터워지기도 하고.
그것은 아마도 작가에겐 괴로운 일이겠지만, 독자로서 따라가는 것도 편안치 않지만
그래서 더 좋고 그래서 읽다보면 더욱 감사하다.
일련의 작품 사이에서 『파씨의 입문』을 꺼내 읽으면, 명랑하고 환상적인 외양이 옅어가고 언어의 기교도 차츰 흐려지면서
여러 생의 이야기가 읽힌다. 그중에서도 「묘씨생」은 특히 기억에 남아, 마음이 쓰여 몇 번이고 읽곤 했다.
「묘씨생」 은 도서관 책으로 처음 읽었는데, 어느 사람인지 밑줄을 직직 그어가며 읽었더라.
일단 도서관 책에 밑줄을 그어두는 것은 성가신 일이다. 밑줄이 있으면 거기에 집중하고 때때로 겨우 이런 것에 줄을 그어두다니 하는 웃음 혹여 이건 잘 그어뒀구나 하는 감탄으로 인하여 책보다도 나에 앞선 어느 독자를 평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억하는 것은, 그 사람이 희한하게도 「묘씨생」의 도중도중, 보잘것없을 것이다-하는 말마다 밑줄을 그어둬서였을까. 마치 시험에 나오는 문제를 짚듯 정확히도 짚으셨군요, 하는 마음에 사진을 찍고 짧은 글을 노트에 썼다.
"그건 그렇고, 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시릿한 생각이다 어쩌면 더 따뜻한 생각도 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결국엔 보잘것없을 것이다 슬프다"
하고.
재미있게도, 비슷한 시기 김애란은 『비행운』의 수록작 「서른」 에 이런 문장을 써 두었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 김애란 『비행운』 수록작 「서른」 297쪽
여유가 나면 『百의 그림자』에 대해서도 글을 써둘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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