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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들/독서와 감상10

일리아스와 불멸을 지향하는 방법 * 이 글에서 사용된 책은 호메로스, 『일리아스』, 천병희, 도서출판 숲(2015) 이다. 일리아스에는 죽음과 체념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짧은 전투에서 전쟁을, 우리의 생을 끝없이 확대해서 보여주는 호메로스는, 그 이미지가 한 사람의 생을 온전히 그려낼 때에 비로소 그 삶을 "청동의 잠을 자게 된" 것으로 마무리한다. 죽음은 필멸의 신들만이 피할 수 있는 것이며, 최고의 영웅 헥토르와 아킬레우스조차 그런 이유로 두려움을 느낀다. 일리아스를 읽을때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아킬레우스도 헥토르도 스스로의 비참한 최후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후 시기의 비극 작품, 예를 들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같은 작품에서, 그리스 비극 특유의 운명에 대한 태도--운명을 피하려고 하나 운명은 결.. 2021. 3. 24.
부끄러운 生과 고민 - 「날개 또는 수갑」 물론 상관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쪽에선 작업중에 팔이 뭉텅 잘려져나간 사람이 있고 그 팔값을 찾아주려고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다른 한쪽에선 몸에 걸치는 옷 때문에 거기에 자기 인생을 걸려는 분들도 계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윤흥길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문학과지성사) 수록작 「날개 또는 수갑」 269쪽 그런 일이 있었다. 불의의 시대가 있었고, 많이 배우고 많이 고민했지만 그 탓에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 지나온 우리가 그것을 꾸짖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 쉬운 복기復棋와는 별개로, 행하는 것은 어렵다.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연작은 그런 의미에서 시대의 반영이다. "나 대학 나온 사람이오" 라고 말하면서도 결국은.. 2020. 3. 1.
왕후장상들의 근심 -『로마제국 쇠망사』 (...) 그는 이미 하사금을 지불하겠다는 유일하게 효과가 있는 주장을 펼치면서 황제 자리를 흥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좀 더 신중했던 근위대는 이런 사적인 흥정으로는 충분한 가격을 받아낼 수 없음을 알아채고는 방벽 위로 뛰어올라 가 큰 소리로 로마 황제 자리가 공매에 부쳐졌으며 최고액을 제시하는 입찰자에게 낙찰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1권 120쪽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막시미누스 황제 때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군사 반란에 대해 소개한다. 모의를 끝낸 군인들에게 황제로(거의 강제로) 추대된 늙은 총독 고르디아누스는 자신의 삶을 평화롭게 끝내게 해달라며 눈물로 호소하나, 결국은 그 짧은 영예를 받아들인다. 그가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혀 자결한 것은 그로부터.. 2020. 2. 17.
시릿한 생각 - 「묘씨생」 아비 곁에서는 도저히 수가 없다며 떠나가는 자식에게 매달려보지도 못하는 인생이란 야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 그걸 아냐 그놈이 아비하고는 다르게 살아보겠다고 그토록 박차고 나갔건만 실은 보잘것없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아들의 인생이라도 별 수 없을 것이다 그놈도 나와 똑같이 보잘것없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웃었다. 음식을 담은 볼이 불룩하게 도드라졌다. 털을 곤두세우고 인간으로서의 노인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웃는다 운다 애석하다 통쾌하다 어느 것도 아니게 다만 기묘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 몸과 같은 묘씨생보다도 못한 일생으로서의 인생, 바로 그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라서 더욱 그랬는지도 몰랐다. - 황정은 『파씨의 입문』 수록작 「묘씨생」 120쪽 황정은 작.. 2020.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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