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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들/궁금했던 것들

주격조사 '가'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by 카프카뮈 2021. 4. 8.

오늘 글을 써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한국어의 주격조사 '가'가 원래 없었다는 것을 정리해본다.
  • 그럼 대체 '가'가 언제 생겼고, 왜 생겼는지 알아본다.
  • 유래에 대한 여러 가설을 검토해 본다.

본 게시글은 서강대학교에서 개설된 이지영 교수님의 국어사(2021 봄학기) 강의를 바탕으로 한다.

또한, 아래의 논문을 인용하여 내용을 보강하였음을 알린다.

고광모. (2014). 주격조사 ‘-가’의 발달. 언어학, (68), 93-118.

 

주격조사 ‘-가’의 발달

논문, 학술저널 검색 플랫폼 서비스

www.dbpia.co.kr


1. 한국어의 주격조사

한국어에서 주어가 등장하면, 그 뒤에는 '이', '가', '께서','에서' 중 하나를 주로 쓴다.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이 : 주어의 마지막 글자에 종성(받침)이 있다면 사용된다. [예 : 알고리즘이 부족해서 취업 준비가 어려워]
  • -가 : 주어의 마지막 글자에 종성(받침)이 없다면 사용된다. [예 : 자바가 쉬운 줄 알았는데 클린코딩은 어려워]
  • -께서 : 체언(주어)에 존칭을 붙인다 [예 : 그분께서 내 코드를 리뷰해주셨어]
  • -에서 : 체언(주어)이 단체명사일때 붙인다 [예 : 미국 회사에서 노트북을 보냈어.]

위의 예시 중 '-께서'와 '-에서'는 특수한 경우이니 제외하고, 일단 '-이'와 '-가'의 경우에 집중해서 살펴보자.

중세 국어에서는 '-가'라는 주격조사가 없었다. 그러면 당시엔 어떤 식으로 주어 뒤에 조사를 붙였을까?

16세기 말엽 이전까지, 중세국어의 주격조사는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 -이 : 현재와 마찬가지로, 주어에 종성이 있다면 사용되었다.
  • [i], [j] 뒤 모음을 제외한 'ㅣ' : 모음이 같은 'ㅣ'로 끝나거나 'ㅣ'를 포함하는 이중모음으로 끝나면, ㅣ를 다른 모음에 합성해서 사용했다.
    • "부톄 손 드르샤" : 부텨 + ㅣ 형태로, 현대어로는 '부처가' 라고 표현할 수 있다.
    • 長子ㅣ 다(여기서 ㅏ는 아래아를 표기한 것)외앳더니 : 한자의 경우 모음을 합쳐 표시할 수 없으므로, 끝에 자음 없는 ㅣ를 써준다.
  • [i],[j] 뒤 영형태소 : 영형태소는 형태소가 들어가야 하는 위치가 비어있으나 그 작용을 하는 경우를 설명하는 말로 생각하면 된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형태에 맞지 않아 생략했다고 생각해도 된다.
    • 불휘 기픈 : 꽤 유명한 문장인데, 여기서 휘가 ㅜ+ㅣ이므로 뒤에 주격조사 ㅣ를 써줄 수 없다. 그래서 비우고 넘어간다.
    • 그러나 "里ㅣ 밝(ㅏ는 아래아)고" 같은 문장이 발견되기도 한다. 한자어인 경우는 규칙을 무시하고 ㅣ를 붙이는 경우가 상당히 많이 보인다고 한다.

2. 주격조사 '가'의 등장

그런데 17세기 초에 '가'가 주격조사로 처음 등장한다.

맨 처음 등장한 '-가'는, 앞서 언급된 세 가지 중세국어 주격조사 형태 중 영형태소 형태를 대체했다.

즉 위에 나온 "불휘 기픈"의 경우, 17세기 초였다면 "불휘가 기픈"(현대어 : 뿌리가 깊은)으로 썼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점점 '-가'의 활용이 퍼지면서, [i], [j] 뒤 모음을 제외한 'ㅣ'의 사용 역시 '-가'의 사용으로 대체되었다.

이에 따라 위의 예시였던 "부톄"의 경우도, 부텨가(현대어 : 부처가)로 썼을 것이라는 것이다.

 

주격조사 '가'의 정확한 등장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존재한다.

그 중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은 죽산 안씨(1495-1573)가 아들 정철에게 1572년 보낸 편지이다.

위의 편지 부분에 주목해 보자. 이후 자료는 모두 17세기 중순 자료이다.

일단 편지를 한번 해석해 보자.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종들(이) 매우 모질어 (구들장을) 아니 데우고 데웠다고 속여서 찬 구들에서 자니 (배가세니라셔) 자러 다닌다"

여기서 "배가세니라셔"는 대체 무슨 의미일까? 위에서는 세 가지 가설을 소개하고 있다. 이를 하나씩 이야기해보자.

  • 배-가 + 셰닐-어서 : 배가 셰닐어서 자러 갔다는 해석. 그러나 "셰닐다"라는 동사는 다른 모든 문헌에서 찾을 수 없다.
  • 배-가 + 셰 + 닐-어서 : 배가 셰 일어나서 자러 갔다는 해석. 여기서 셰는 세게 라는 뜻의 부사로 봐야하나, 그런 사용 용례도 찾을 수 없다.
  • 배-() + 가셰 + 닐-어서 : 배(뒤에 조사는 영형태소) + 가셰 + 닐어서. 현대어로는, 배가 가시 일어서 라는 뜻이 된다. 그럴듯한 가설.

앞선 논문(고광모)에서는 "흔히 송강 정철의 어머니가 1572년에 쓴 편지에 나타나는 ‘배(아래아+ㅣ)가세니러셔’를 주격조사 ‘-가’의 예로 간주해 왔는데(유창돈 1964: 228, 이기문 1972: 155 등) 그것이 옳다면 그 주격조사 ‘-가’는 16세기 문헌의 유일한 예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위의 1572년 편지를 '-가'의 첫 등장으로 보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 많다.

이 부분은 관련 논문을 더 읽지 못해서 최신 트렌드를 100% 반영한건 아닐수도 있다.


어쨌든 위의 가설 중 첫번째와 두번째를 배제하여 '-가'가 해당 편지에서 사용되지 않았다고 하자.

이 경우, '-가'의 사용 용례는 17세기로 밀려나게 된다.

위의 자료에서는 특히 효종이나 인선왕후의 편지를 주로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간명하다.

왕실의 인물들은 만나는 사람들의 폭이 제한적이며, 언어 사용에 폐쇄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문법의 변화가 왕실에까지 반영되었다면, 이를 통해 해당 문법이 이미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17세기 중순에 (왕이 세자시절부터 이미 쓰고 있었으므로) '-가'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으리라 추측한다.


3. 그런데 어디서 온거야?

하지만 여기서 미스테리 발생. 대체 '-가'는 어디서 온걸까? '-이'랑은 생긴것도 한참 다른데 말이다.

일단 교수님의 가설들을 바탕으로, 하나씩 고민해보자.

일본어 'が'의 차용

일본어에서 차용됐다는 의견. 나도 직관적으로 이거부터 생각했다. 일어에서의 활용이 한국어와 비슷해서. 또한 '-가'가 집중적으로 사용되는 출처 중 하나가 1676년에 출간된 <첩해신어>라는 책인데, 이 책이 일어 학습 용도라 더욱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의견으로 학계에서 보고 있으며, 관련된 논문도 거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왜 그럴까?

일단 외국과의 교류가 있더라도, 단어 수준에서의 언어 변화는 가능해도 문법 수준의 차용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영단어를 일상중에 사용하지만, 영문법에 맞게 한국어 문법을 바꿔 말하는 일은 일상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니까. 또한 논문(고광모)에서 지적하는 바, 17세기 이전에는 일본어와 국어의 접촉이 미미했기 때문에, 1876년 이전에 일본어가 국어에 그정도의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논문에서 지적하는 일본어의 영향은 단어의 차용, "담배"와 "고구마" 정도에 그친다.

또한 위의 <첩해신어>의 경우 1676년에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이미 1641년에 효종이 장모에게 쓰는 편지에서 '-가'가 등장한다는 점. 그래서 <첩해신어>을 바탕으로 일어와의 관련성을 증명하는 논의도 그다지 설득력을 가지지 않는다.

또한, 일어 기반의 표현임을 당대 사람들이 알았을 때, 그것이 과연 왕실에서도 사용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도 가질 수 있다.

첨사 '가'에서의 발달

이는 일부 문헌에서 기존 '-이'와 '-가'가 혼용되는데에 바탕을 두고, 첨사로 쓰이는 '-가'가 이후 조사로 변용된 것이 아닌가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이다.

그러나, 이러한 활용은 18세기 이후 두드러진다는 반론이 존재한다. 그 이전에도 위처럼 첨사가 활용되는 경우가 보이지 않아 증명이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위의 논문(고광모) 95-99pp에서 추가로 다루고 있다. 그 논문에서는 '-이라가' 라는 표현에서 왔다는 의견을 함께 검토한다.

의문 조사 '가'에서의 발달

중세국어 시기에는 의문조사라고 하여, 명사 뒤에 '가'를 붙이면 의문문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해당 표현이 변용되어 주격조사가 된 것이 아닌가라는 가설을 제시하는 것이다.

논문(고광모)의 저자는 108-113pp에서 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다만 이것이 자명하다고 증명하는 것이 아닌, 현재까지의 가설 중 의문조사 '-가'에서 나왔다는 가설이 제일 낫다는 것만을 주장하며, 이를 증명할 수 없고 가능성이 높음을 설명할 뿐이라고 언급한다.

동사 '가-'의 활용형 '가'에서 발달

동사 '가-'("어디에 가다" 할때 그 '가-'이다)의 활용형 '가'에서 나왔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보자. 아래와 같은 문장을 보면,

"내가 가 알아보고 오마" / "너는 가 밥이나 먹고 오너라"

주어 뒤에 '가-'의 활용형이 사용되고, 이것이 주어와 결합된 것이 아니냐는 의견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논문(고광모)의 100-108pp에서도 다루고 있는데, 이에 대해 필자는 부정적인 의견을 표현한다. 언중이 '가-'의 의미를 잊고 변용하여 사용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낮고, 103p에서의 사투리 구문을 바탕으로 '가'가 의미를 잃을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증명해 내었기 때문이다.

 

위의 논의들은 모두 가설일 뿐이며, 각각의 논증이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가지는지를 설명할 뿐이다.

아직까지 논의가 음성의 유사함에서 출발한다는 한계점이 존재하며, 또한 관련된 증거가 불충분한 것도 그 이유가 된다.

 


글을 맺으며

'-가'와 '-이'로 나눠서 주어 뒤에 조사를 붙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사실 둘이 뭐가 다르고 어떤 규칙이 있는지도 최근에 알았다.

한국어 화자인 나(와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는 그것을 규정보다는 자연스러움의 정도로 여기기 때문이리라.

다만 내가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던 것이 어느 시기에는 부자연스러운 것이었음을 알고,

그 유래를 따라가면서 당시엔 어떻게 말했을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를 상상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최근에 들어 연구자들의 방법론을 따라가는 것에 재미를 느낀다.

어떤 현상을 분석하고, 그 현상을 귀납적으로 모아서 하나의 가설을 만들고, 그 가설의 반례나 증거를 더 모으는 일.

그렇게 쌓인 지식들이 다시 새로운 가설의 증거 혹은 반례가 되는 일. 이만큼 흥미로운 상호작용이 있을까.

이는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도 유사한 것이 아닐까 싶고. 

 

프로그래머로 살아온 과정도 생각해보면 비슷하지 않나 싶다. 

늘 더 좋은 코드와 설계를 찾아가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을 취합하고 스스로 하나의 방법(일종의 가설)을 선택하는 것.

 

앞으로도 이런 연습을 많이 해봐야겠다. 

최근엔 한국어 의미론에도 관심이 있는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포스팅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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