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것들/독서와 감상

왕후장상들의 근심 -『로마제국 쇠망사』

카프카뮈 2020. 2. 17. 08:00


(...) 그는 이미 하사금을 지불하겠다는 유일하게 효과가 있는 주장을 펼치면서 황제 자리를 흥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좀 더 신중했던 근위대는 이런 사적인 흥정으로는 충분한 가격을 받아낼 수 없음을 알아채고는 방벽 위로 뛰어올라 가 큰 소리로 로마 황제 자리가 공매에 부쳐졌으며 최고액을 제시하는 입찰자에게 낙찰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1권 120쪽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막시미누스 황제 때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군사 반란에 대해 소개한다.

모의를 끝낸 군인들에게 황제로(거의 강제로) 추대된 늙은 총독 고르디아누스는 자신의 삶을 평화롭게 끝내게 해달라며 눈물로 호소하나, 결국은 그 짧은 영예를 받아들인다. 그가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혀 자결한 것은 그로부터 36일 뒤이다. 


  로마제국 쇠망사 초반부의 재미는 그 무상함에서 나온다. 제국의 쇠망 속에서 황제의 자리는 군인들에 의해 수시로 교체되고, 심지어 근위대의 손에 낚아채여 공매에 오르기까지 하니까 말이다.

  상단의 인용은 공매에 오른 황제의 자리를 묘사하는 장면으로, 콤모두스와 페르티낙스의 죽음 뒤 즈음이다. 이를 구매한 율리아누스는 66일 뒤 "궁전 안에 있던 욕탕의 한 방으로 끌려가 참수당했다".

 

율리아누스가 궁전에서 처음 본 것은 머리가 잘려 나간 페르티낙스 황제의 시신과 초라한 저녁상이었다. 그는 시신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초라한 저녁상에는 코웃음을 쳤다. 그는 성대한 만찬을 준비할 것을 명했고, 밤늦은 시간까지 도박과 유명한 무용수였던 필라데스의 춤을 즐기며 향락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아첨꾼들 무리가 물러나고 혼자만이 고독과 어둠 속에 남겨졌을 떄, 율리아누스는 그날 벌어진 무시무시한 일들을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의 성급하고 어리석은 행동과 덕망 높았던 전임 황제의 비참한 최후에 대한 생각, 덕망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돈으로 사들인 황제 자리에 대한 불안감 등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을 것이다.

 -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1권 122쪽

책에서는 부하들에게 황제로 추대받은 후 "너희들은 오늘 너희의 유능한 사령관을 잃었다"라고 말하였다는 어느 장교의 일화를 덧붙인다. 자신을 영광스러운 로마 제국, 세계의 한가운데에서 빛날 왕중왕으로 추대하지 말아달라고 빌었던 이들은, 대체 어떤 기분이었을지 내심 상상하게 된다. 

 

슬픔은 시간의 흐름과 휴식의 시간을 깨뜨리는구나,

슬픔은 밤을 아침으로, 대낮을 밤으로 만드는구나.

왕후장상들은 그 칭호로 빛나지만

외적인 영예는 내적인 고통의 대가로 주어지는구나,

그리고 그들은 상상 속의 허망한 명예를 좇느라,

불안과 근심 가득한 세상을 느끼는 경우가 허다하다.

왕후장상들의 칭호와 천한 이들 이름 사이의

차이라고 해봐야 기껏 호칭뿐이 아닌가?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 1막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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